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문단 편집) ==== 계속되는 소모전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등장은 과거 군인 황제 시대, 3세기의 위기, 무정부 시대, 제국의 위기 등으로 불리는 로마 제국의 암흑기 개막 정도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악평에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하기 전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치세 후기부터 제국은 페르시아의 등장과 침공, 라인강과 다뉴브강 일대에 자리잡은 게르만족들의 성장과 발전,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시작된 제국의 한계 등이 맞물려 '외부 침략', '내부적 한계', '경제 쇠퇴'라는 세 가지 위기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암흑기의 개막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라는 냉혹하고 비열하나 뛰어난 현군의 등장으로 늦춰졌다는 건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후 세베루스 왕조는 이 사람을 능가하거나 비슷한 능력을 가진 황제 혹은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지 못하면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된 이후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238년 터진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과 이에 편승한 원로원의 행동이 맞물려 원수정 체제와 로마 제국의 내재적 한계, 모순의 심화로 귀결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막시미누스의 즉위와 등장이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얼핏 이 사람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235년부터 벌인 대대적인 전쟁들은 인적, 물적 한계를 감안해야 하는 제국을 계속되는 소모전 양상으로 몰았고, 그가 벌인 3년의 실책과 무자비한 행동은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도전과 내전의 심화, 원로원 내 권력투쟁까지 정례화시켜 3가지 위기라는 뇌관이 모두 폭발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모자와 황제 자문회의 위원 중 마인츠 병영 안에 있던 이들을 모조리 죽인 직후, 막시미누스는 아그리 데쿠마테스 늪에서 알레만니족과 전투를 치룬다. 이 전투에서 막시미누스는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원로원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이때 원로원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이 무렵 죽은 파울리나를 신격화해주고 막시미누스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에게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칭호를 내려 막시미누스 일가에게 황족 지위와 정통성을 모두 선물로 줬다. 원로원의 유화적 태도에 고무된 막시미누스는 곧바로 하르즈호른 전투로 불린 베저 강과 그 너머에서 재차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막시미누스는 1세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라인강 일대 로마군과 퇴역병 후손들에게 전쟁 영웅이자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대 드루수스]] 같은 위상을 끌어올렸다고 착각했다.[*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바타니아, 갈리아 벨기카 일대에서 대 드루수스와 그 장남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자발적 추모와 인기는 3세기 후반까지 계속될 정도로 대단했다. 따라서 독일 마인츠에는 아직까지도 드루수스탑이 남아있다. 대 드루수스가 추앙받은 것은 개선식을 앞두고 전투 승리 후 도하 중 낙마사고로 29살의 나이에 요절한 것도 있지만, 로마군들이 드루수스 부자를 진심으로 사랑해 후손들까지 좋아한 이유는 이들 부자가 보여준 실력과 인품,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대 드루수스는 용장이지만 외교술에 능하고, 과감한 정공법과 전술을 곁들인 카이사르 같은 전략가였는데 이런 점은 형 티베리우스, 후임자인 아헤노바르부스와 확실히 차이가 있어 로마군은 대 드루수스를 무척 존경했다. 더욱이 그는 아들 게르마니쿠스처럼 아랫사람들에게도 자상하고 인간적인 인격자라서 로마군과 그 가족, 보조병 후손들까지 미워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한 뒤 사회적 현상으로 발생한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토대 중 하나가 됐다.] 베저 강을 돌파해 [[북해]]까지 진군해 게르마니아 마그나의 심장부까지 진군한 장군은 대 드루수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을 했던건데,[* 우격다짐으로 부하들의 희생과 물량 소모로 진격한 막시미누스와 달리, 대 드루수스는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게르만족의 심장부를 단번에 박살낼 요량으로 북해로 배를 띄워 베저 강 너머의 게르만족 심장부를 일격에 박살낸 뒤 그곳 부족장들에게 그들의 아들들을 로마 인질로 받고 친로마파로 만드는 성과를 냈다. 따라서 이 사건 직후 로마군은 자신들이 신들도 허락하지 않은 게르마니아를 거의 정복했다고 생각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자기 아들이 얼마나 큰 성과를 냈는지 공개적으로 자랑했다. ~~ 하지만 이런 성과를 내고 1년 뒤 드루수스는 낙마사고로 개선식 직전 요절, 이후 바루스가 등장하는데(...).~~] 문제는 두번째 원정 이후 막시미누스가 중2병 대사를 늘어놓으며 원로원에게 "어떤 로마인들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냈다"며 황제가 칭찬을 구걸하는 보고서까지 냈다. 허나 아그리 데쿠마테스 늪에서 벌인 첫 전투, 베저 강 일대에서 벌인 두 번째 전투 모두 로마 입장에서 개운한 전투가 아니었다. 첫 전투에서 로마군은 막시미누스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전법과 명령으로 막대한 희생자를 낸 끝에 알레만니 족을 물리쳤고, 두 번째 원정에서도 개운한 승리보다는 물량을 밀어붙어 얻어낸 승리에 가까웠다. 그래서 보고서 두 권을 받아 이를 들은 원로원은 눈치를 채고 그저 박수를 치고 환호할 뿐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막시미누스는 게르마니아 국경선을 확보했다며 겨울철 숙영지를 세운 뒤, 235년과 236년 국경 밖의 다키아인과 사르마티아인들과 싸웠다. 그런데 이 역시 그 양상은 소모전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런 원로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할 일이었던 국경 방어, 즉 야만족 격퇴[* 를 빙자한 최전방의 패싸움]에만 열을 올리는 모양새로 238년까지 도돌이표로 흘러갔다. 막시미누스 황제는 원로원과의 관계가 어찌 되었건 전방의 군단병들은 자신의 무력 하나는 신뢰하고 있었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쨌든 패싸움이었으니까. 소모전이라고 해도 이것에만 몰두했다. 상술한 것처럼 베저 강 인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원정 이후부터는 아예 전선까지 넓히는 모양새로 소모전을 벌였으니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게르만족들은 로마인들이 문명화시키기도 어려웠고 게르마니아의 숲과 늪이 즐비한 지형 때문에 회전에서 신묘한 용병술로 무찌르기도 어려웠으며 다만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힘'에 굴복하기 때문에 체구가 작은 로마인들을 깔보는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이 있어 이 소모전을 마냥 비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쉽게 말하면, 게르만족을 두들겨 패서 굴복시키는 역할에는 스키피오 같은 전술의 천재나 스틸리코같은 실질 강건한 장군보다는 이런 지치지 않는 거구의 천하장사가 더 잘 맞았다는 얘기다. 트락스 황제 치세에 게르만족을 말 그대로 박살낸 라인 강 전선은 이후에도 그 기능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시기에 침입해 온 게르만족이 공격한 지역 대부분이 도나우 강 방어선이라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막시미누스가 이런 소모전을 벌여도 게르만족들은 238년 이후에도 그가 소모전을 벌인 라인 강 전선(특히 라인강 하류인 저지 게르마니아)으로도 잘만 쳐들어 왔다. 이렇게 되니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대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로,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 안토니아의 남편이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사위이자 [[옥타비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부부의 첫번째 사위.]가 공들여 만들고,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연이어 게르마니아 후방 병참 기지이자 방어선 후방 지원 핵심으로 보강한 북부 갈리아 일대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 이후 3세기 내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됐다.[* 북부 갈리아가 안정화된 것은 [[갈리에누스]] 황제가 이 일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하고 난 이후였다.] 즉, 로마 제국이 300년째 노력한 라인강 방어선과 후방기지들이 막시미누스의 계속된 소모전의 수혜를 온전히 입지 못했다는 말이다. 다행히 시대가 변하면서 게르만족도 군단 주둔지를 피해 말을 타고 달리며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도주 하는 등 방어선을 미친듯이 쑤셔대고 있었기 때문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같은 무식한 소모전은 쓸모가 있긴 했다. 로마군의 전통적인 강점인 군사학, 토목기술, 공학, 보급능력 등이 더이상 제대로 통하지 않고, 게르만족들이 부족 체계에서 왕국 형태가 되고 전술이 다양해진 측면에서 놓고 보면 적합한 전략일 수도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황제가 되기에는 군경력이 그렇게 일천한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다른 주력 최전방 방어선의 군단장들이나 군사령관들이 삼황제시대 때 처럼 원로원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나약해빠진 세베루스 왕조의 전대 소년 황제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미 기존 방식으로는 나날이 발전해가는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된지 오래인 시점에서 로마군 내에 게르만족을 압도할 수 있는 다른 능력자가 없다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택에 황제가 치세 내내 자리를 비웠는데도 군단들이 전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아서 외려 내정이 안정될 수있었다. 성군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동방군단의 반란을 겪은 걸 생각하면 이것도 나름 대단하긴 한거다. 다만 이렇게 최전방에서 야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과 후방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먼저 트락스의 군사행동은 실적에 비해 소모적이며 비용이 깨지니 텅 빈 국고를 세금을 올려 메꿀 수 밖에 없었던 탓에 원로원과 민중들의 세금부담은 날이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닌게 아니라 게르마니아는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본국에서 전시세금을 뜯어내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정복전쟁을 하느라 그야말로 피똥을 쌌던 땅이다. 솔선수범하느라 황궁 살림살이까지 경매로 팔아치워서 군 재정에 보태고 중병을 앓으면서도 치료도 못하고 아편까지 복용해가며 억지로 고통을 참고 춥고 습한 북방 땅에서 병사들을 직접 독려하다가 죽은 황제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후임 황제 콤모두스에 대한 여론이 치세 초기에 마냥 좋았던것도 게르마니아 정복전이 중단되어 전시세금 징수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국 이탈리아와 각 원로원 속주에서는 조세저항이 불같이 일어났는데, 이런 상황에도 승리에 취한 황제는 원로원에 보내는 보고서에도 무슨 중2병 일진의 일기장같이 천박한 폭력과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았다. 게다가 그때마다 황제는 원로원 측에서 조세저항의 심각성을 진언해도 야만족과의 패싸움을 이유로 강탈하듯 세금을 거둬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